이민법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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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미국 시민으로 미국사회서 당당하게 살아라'

  • 이민스토리
  • 2017-10-01 17: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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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미 61년째 김응창 전 워싱턴한인회장
 
워싱턴 한인사회의 원로인 김응창 회장이 자시의 삶의 역정과 한인커뮤니티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1956년 도미, 조지타운대 졸. 1970년 워싱턴한인회장, 74년 워싱턴한인봉사센터 설립, 81년 입양기관 ASIA 설립 운영…. 그의 삶을 일별해도 워싱턴 한인 커뮤니티의 역사와 함께 해온 커다란 족적이 느껴진다. 올해 82세인 김응창 전 워싱턴한인회장(락빌 MD 거주). 그가 만년에 한국정부의 유공동포 포상 후보자로 확정됐다는 소식에 한인사회는 하나같이 반겼다. 자신의 작은 업적도 부풀리는 시대에 그는 묵묵히 헌신과 기여의 한길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김 전 회장으로부터 워싱턴에서의 60여년 삶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한국정부 유공동포 포상 후보자 확정에 한인사회“환영”
‘민통’ 10년 활동에 반정부인사로‘찍혀’ 번번히 막판 탈락
“ASIA·복지센터 설립 등 워싱턴 한인사회에 큰 족적” 평가
 
-재외 유공동포 후보자로 확정된 걸 축하한다. 그동안 포상 받은 적이 없다는 게 신기하다. 
▲그동안 여러 번 추천된 적이 있었는데 위로 올라가니 다 잘리더라. 박정희 정권 때 반정부 인사 블랙리스트의 맨 위에 올라간 기록 때문이다. 박 대통령 사후에도 그 기록 때문에 계속 잘렸다. 하물며 김대중 대통령 당시에도 막판에 누락됐다. 그 후부터 포상에 나를 추천하지 말라고 단체마다 당부하고 다녔다. 이번에도 기대 안하고 있다.  
 
-블랙리스트에 오른 건 어떻게 알았나?
▲전두환 정권 초기에 유병현 주미대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한번 만나자는 건데 거절했다. 근데 어떤 행사장에서 우연히 만났다. 유 대사가 그랬다. “자네가 반정부 인사 리스트 맨 꼭대기에 있던데 다 취소시켰다. 비자도 내줄 터니 한국에 다녀와라. 내가 자네 부친과 가깝게 지냈는데 부친이 한국서 기다리실 것이네.” 
내가 미 시민권자인데 그 전에 한국 방문하려고 비자 신청하면 거부당했었다. 
 
-그래서 한국에 갈 수 있었나?
▲그 다음 해 한국에 갔다. 김포공항에서 입국심사를 하는데 검은 양복 입은 사람이 다가와 “날 따라오시오” 했다. 기관에서 나온 사람처럼 보였다. 그가 “이제 입국금지는 해제됐지만 행동은 조심하시오.”하고 경고했다. 기분이 안 좋았다. 
 
-모범생 스타일인데 왜 반정부 인사가 되었나?
▲내가 1970년 말부터 13대 워싱턴한인회장을 지냈다. 그 무렵 유신이 일어나자 워싱턴에서 교포들이 반대시위를 벌였다. 한인들도 얼마 되지 않을 때인데 엄청나게 듀퐁 서클에 모였다. 한인회장 신분으로 나도 참가했다. 모국의 민주화를 열망하는 마음에서다. 
그 후 반(反)유신 리더들이 모임을 발족했다. ‘Korean Congress for unification’이란 단체인데 약칭 ‘민통’으로 불렀다. 캐나다에 계신 김재준 목사님이 회장이시고 전국에 5명의 부회장이 있는데 내가 워싱턴 부회장이었다. 10년간 활동했다. 
 
-‘민통’이라면 당시 야당 지도자였던 김대중 씨와 가까운 해외조직이 아닌가. 인연이 있나?
▲내가 몸담은 미 수도노회는 보수적인 장로교의 전통을 이어받지 않고 진보적이었다. 수도노회는 DJ를 비롯해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싸우는 분들을 후원했다. 동아일보 폐간 사태 때도 광고를 냈고 목사님들은 한국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런 배경에서 나도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것이다. 
전두환 시절에 DJ가 워싱턴에 망명 와서 있었다. 그가 전화를 걸어와 만나자고 했다. “이제부터 할 일이 많으니 함께 하자.” 
내가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것은 정치활동을 하려는 게 아니라 한국의 민주화를 돕는 일이란 생각에서였다. 만일 내가 DJ 옆에서 정치적 활동을 하면 남들에게 정치적 야심이 있는 걸로 밖에 비쳐지지 않는다. 난 거절했다. 그걸로 김대중 씨와의 인연은 끝났다. 
 
-당시 중앙정보부의 압박이 심했을 텐데.
▲해병대 출신인 양두원 대사관 중정 공사가 내 부친을 ‘할아버지’라 불렀다. 그 부인이 내 조카뻘로 인척관계였다. 내 선친은 1950년대 말에 3대 해병대 사령관을 지냈다. 6.25 때 도솔산 전투를 연대장으로 지휘한 분이다. 그 무렵 주미대사관의 KCIA를 중심으로 방해와 압박이 많았다. 힘들었을 때다. 
 
-인생유전이 심했다고 들었다. 
▲맞다. 내가 1935년 생으로 강원도 화천이 고향이다. 구만리 발전소 근처인데 수몰됐다. 조부가 감리교를 통해 인근에 소학교를 지었는데 일어교육을 거부했다. 총독부가 조부 뒷조사를 했다. 양정 전문 법과생일 때 3.1운동 주도한 걸 밝혀내 체포령이 떨어졌는데 친구이던 강원 도지사가 귀띔을 해줘 만주로 피신했다. 대동아전쟁 터지고 두만강을 건너 회령의 탄광에 숨어 살다 47년에 월남했다. 선친이 해군 일을 맡으면서 진해와 인천, 서울을 옮겨 다니며 학창시절을 보냈다.
 
-난리통에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겠다. 
▲선친이 해군 인사국장을 하며 서울로 오시자 미 군사고문단 장교관사에 묵었다. 무조건 가장 가까운 학교를 택해 용산중을 다녔다. 전쟁이 나자 마지막 피난열차를 타고 부산으로 갔다. 부산과 진해에서 학교를 다녔다. 어린 마음에 지긋지긋했다. 그래서 선친께 미국 유학가고 싶다고 말씀드리니 “군 복무 마치고 가라”고 하셨다. 군에 다녀와 문교부 특별장학금 시험에 합격해 미국에 유학 오게 된 것이다.  
 
 
 
-격동의 역사가 개인의 삶을 뒤흔들어 놓은 형국이다. 미국에서는 제대로 공부를 했나?
▲1956년 부산서 배 타고 미국 왔다. 캔사스 주니어 칼리지를 마치고 조지타운대에서 외교학과를 졸업했다. 박동선 씨가 같이 다녔는데 그가 1년 선배다. 국무부에 취업원서를 내니 시민권자가 아니라고 거절당했다. 카톨릭대 대학원에서 국제관계학을 3년 공부하다 박사학위를 못 받고 포기했다. 조지타운 4학년일 때 뉴욕서 FIT 다니던 김수희와 혼인했다. 
 
-입양아들의 대부로 불리었다. 어떻게 입양 사업을 하게 됐나?
▲졸업 후 컨설팅 회사를 운영했다. 그런데 당시 한국의 홀트아동복지회가 문을 닫았다가 정부가 이사회를 조직해 다시 열게 됐다. 선친이 이사회 의장에 임명되셨다. 미국에서 입양을 하려면 한국정부의 인가를 받아야 했는데 선친께서 나보고 “입양기관을 설립해 달라”고 당부하셨다. 그래서 1981년 ASIA(Adoption Service Information)를 설립했다. 처음엔 뒤에서 돕다 25년간 맡아서 하다 2004년 은퇴했다. 그간 3,200명을 입양했다. 
 
-요새 입양아 추방문제가 관심을 끌고 있다. 미국에서 불행해진 입양아들도 많다. 한국에서 입양을 아직도 해야 하나? 
▲입양아들은 대부분 부모의 보호 없이 보육원이나 고아원에서 자라게 된다. 그것보다는 미국이나 어디가 됐든 양부모 밑에서 자라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물론 개중에 불행해지는 아이들도 있다. 
그래서 입양기관의 역할이 중요하다. 우리는 양부모를 선택할 때 신경을 많이 썼다. 그들의 수입과 입양동기를 조사하고 정신적 배경까지 확실해야 허가를 내줬다. 입양을 할 때는 양부모를 잘 선택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 
 
-워싱턴한인복지센터 설립 이후부터 큰 애착을 보였는데 초기 역사를 소개해 달라.
▲내가 워싱턴한인연합장로교회에 몸담고 있다. 1969년 정용철 목사가 새 이민자들에게 도움을 주자는 제안을 했다. 당회에서 내가 우리 교회뿐만 아니라 모든 교포들을 대상으로 도움을 주자고 확대 제안을 한 게 받아들여졌다. 
74년 워싱턴한인봉사센터(현 복지센터)가 설립돼 정 목사가 초대 이사장을, 내가 3대 이사장으로 5년간 봉직했다. 그 후로도 계속 이사로 있다. 
 
-메릴랜드의 노인아파트 건립에 큰 역할을 했다고 들었다. 
▲최경수 총무와 정부에 노인아파트 신청을 몇 번 냈는데 안됐다. 입양아 양부모가 마침 그 기관에 관계하고 있어 알아보니 경험과 예산도 없고 복지센터의 실적도 없는 게 이유였다. 그의 조언대로 경험있는 기관과 손을 잡고 다시 신청해 승인 받았다. 91년 메릴랜드 실버스프링에서 유니버시티 가든 아파트가 완공됐다. 한인들의 첫 노인아파트인데 90% 이상 한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미국생활 61년째다. 후발 이민자인 한인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난 학생으로 와 주저앉아 미 시민이 됐다. 한국 전통과 문화를 지키려는 노력도 좋지만 가능하면 이민자들은 미국에 일찍 적응해 미국 시민으로 당당하게 살 준비를 해야 한다. 
복지센터도 미국 안의 한국사회를 따로 만드는 것보다 한인들이 미 시민으로 정착하게끔 돕는 걸 지향하고 있다. 
 
 
미주 한국일보 이종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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